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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코스 비평(1)-너무나 모자란 기독론

나중된자 2008. 2. 14. 20:26
'알파 코스'는 1977년 영국성공회 성삼위브롬튼성당(HTB)의 당시 부임사제 찰스 만함이 착안/시작했다.
그후 존 어바인 신부, 니키 리 등을 거쳐 니키 검블 신부(현 HTB 주임사제)가 알파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알파의 실세는 '알파의 대부'라고 불리는 전 HTB 주임사제 샌디 밀러 신부. 밀러를 모르면 알파의 실체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읽다 보면 차차 알게 되지만 밀러는 대단한 '문제인사'다. 그와 검블은 모두 변호사(barrister) 출신이다. 영국 교계와 법조계는 사실상 프리메이슨들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안다(밝혀진 수많은 증거가 있음).

알파코스는 가히 현상학적으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2007년에 세계 160개국에서 33,500회 실시됐고 개시 이래 현재까지 약1천만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다. 류영모 목사(전 알파코리아 이사장)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3000여 교회가 적용하여 약10%인 300%가 "'급성장'을 맛보고" 있단다. 물론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다.  

이에 정반대되는 기이한 현상 한 가지는 알파는 성공회에서 일어난 운동인데도 영국 성공회 교인수의 감소세 물결은 돌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격언이 여기 해당되는 걸까? 그러니까 해외 참여자수만 늘고있는 셈이다. 문제는 알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검블 식 기독교관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랄 수 있다.  

어떤 신학토론과 변증도 마찬가지지만 우리의 알파 담론에서도 기독론(예수 크리스토관)은 응당 가장 중시돼야 할 한 분야일 것이다.

알파에 관해서는 물론 본토 사람이 더 잘 안다! 영국의 변증가 더스티 피터슨과 일리저벹 맥다널드의 공동 연구결과를 간추려 인용한다. 글 일부는 이해하기 쉽도록 보충도 했다.

[피터슨과 맥다널드는 특히 니키 검블의 영상물, '알파 토크' 비디오를 샅샅이 듣고 이 글의 원본을 썼다. 참고로..본 필자는 피터슨-맥다널드의 모든 글과 다양한 저서들의 무제한 전재/인용/번역 허락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

무죄성

성경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히 4:15, 요서A 3:5b, 신32:4). 만약 주님이 흠 없는 어린양이 아니라면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 없었다(페트로A 1:19).

이 점에 대해 알파는 묘한 애매함을 드러낸다. 알파 비디오엔 주님이 '무죄하다'는 말이 안 나온다. 더욱이 니키 검블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유혹 받으셨다"(히4:15)는 성구를 인용할 때 수상쩍게도 "단, 죄는 없으시다"는 후반절을 빼버린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유혹 받으셨다. 바로 우리처럼. (그래서) 예수님은 악한 생각을 가지셨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토크11' 참조. 알파에선 설교를 '토크'로 부른다. 여기서 '토크'란 2000년 여름판 공식 알파 비디오를 가리킨다.]
 
검블은 앞서 '토크3'에서 "..악한 생각은 속에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그것들은 우리를 부정하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주님의 '악한 생각들'이 그분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따라서 악한 생각들을 품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이기가 쉽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주님의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들어왔어도 즉시 물리치셨음에 틀림없다. 검블은 이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검블은 '주님의 친구들'이 그분의 무죄성에 관해 말했다고 은근히 간접적으로 말한다(토크2 참조). 그런 말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을 때는 "친구들 말이니 참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고 느낄 수 있다. 검블은 또 코린토B 5:21을 참고하면서 "여기서 성 페트로는 '하나님이 죄를 모르는 분을 우리를 위해 죄 삼으셨다'고 썼습니다"라고 말한다(토크4). 역시 수상한 것은 검블 자신의 성경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고 돼 있는데 위와 같이 바꿨다는 점이다.
히브리 정신 바탕에서 '죄를 몰랐다'는 말은 그의 죄에 무지했다거나 깨닫지 못했다거나 죄와 친밀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검블은 또 "예수님은 본인의 죄 탓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으셨다"고 말한다(토크3). 본인의 '죄'? 이런 언급엔 여전히 묘한 의문이 남아 돈다. 검블은 그보다 "예수님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never did) 않으셨다"(토크3&4)고 말하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검블은 다른 부분에서 우리가 행(do)하는 것만이 아닌 우리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도 문제(matter)라고 말한다(토크 12, 3 참조). 결국 논리적으로 예수님이 생각 또는 말로 죄를 지으셨을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둔 셈이다.

주님이 죄가 없었다는 것은 범죄를 피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죄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코A 15:22). 예수님은 '원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동정녀에게서 나셔야 했다. 그런데 니키는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인간들의 작업'인 건물에다 비긴다. 예수님의 잉태가 "전적으로 인간들의 작업"이었다면 인간의 죄성을 타고 났고 따라서 무죄하지 않다는 얘기가 돼 버린다.
그러면서도 검블은 우리의 잘못과 실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토크1 참조). 그렇다면 주님이 잘못하셨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버릴 수 있다.

무오성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진리로..가득하다고 말한다(요1:14). 또 주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고 증언한다(제파니아=스바냐 3:5, 신명기 31:8 참조). 그런데 알파토크에는 예수님의 '유오'나 '무오'라는 실제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 1:3은 예수님에 의해 "만물이 지음받았다"고 명언했지만 알파는 때때로 창조사역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는 암시를 은근히 주곤 한다. 예를 들면 검블은 '잘못된 창조 질서'를 논한 적이 있다(토크11 참조). 주님의 완전한 창조 작품엔 아무 잘못도 부족도 없건만. 죄로 인해 창조물이 오염됐지만 검블이 말하는 건 이게 아니다. 또 우주초기에 '공허와 혼동'도 은근히 성령의 책임인 듯 은근히 전가하고 있다. (그린: '알파 매뉴얼' 1995년, 30쪽 참조].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신데도 말이다(코A 14:33).    

검블은 또 마치 소경에게 재차 안수하신 것이 예수님의 '믿음 부족' 탓이기라도 한 양 은근히 잘못 부각시킨다. 즉 "예수님은 아무한데도 '그대가 고침받지 못한 것은 믿음 부족 때문이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자넨 믿음이 없어'라곤 했어도 환자한데는 그러지 않았습니다."(토크13). 그런데 이에 앞서 검블은 "예수님조차도 한때..안수를 재차 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예수님조차'도? 안수를 재차 하게 된 게 예수님 책임이란 말인지? 성경은 예수님의 신유 기도에 관하여 환자 편의 믿음 부족을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맑6:5~6).

토크1, 7에서 검블은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한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토크7에서 그는 "결론적으로..가이던스의 온 이슈는..예수님께도 쉽지 않았습니다..둘째로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들어본 일이 없는 비신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떨까?

"예수님은..가장 완전히 인간적인 분, 가장 정상인 분이었습니다." 검블의 이 말은 듣기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인간적', '정상'이란 말은 흔히 실패와 불완전을 뜻하는 세속적 표현이기 때문. 검블은 주님이 완전하고도 정상적인 분이셨다는 말을 아낀다.

검블은 "오직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만 무오한 진리를 발견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반드시 예수님의 행동이 늘 무오하다고 하는 뜻은 아니다. 그는 또 "예수 크리스토 안의 하나님의 계시는 무오하다"고 하는데 왜 이런 수식어를 덧붙이는지도 묘하다. 왜 그냥 단순히 "예수는 무오하시다"란 말은 하지 않을까? 15개의 기나긴 토크와 발행물 속에서도 예수님의 완전무죄, 전적무오를 거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온유/겸손하고 은혜로우심

파울은 주님이 "온유하시다"(코B 10:1)고 했고 주님 자신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다(마11:29). 그분의 온유/겸손은 이미 성육신 전에 예언됐다(제카리아=제카리아 9:9, 마 21:5).  

알파토크에선 예수님의 온유/겸손/은혜로움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알파의 다른 곳에는 성육신하신 주님이 오히래 매우 온유/겸손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가지셨던 감정리스트 제일 꼭대기는 '분노'로 장식돼 있다. 검블은 "예수님은 언제라도 희생/고난(suffering)과 싸우셨다"고 어리둥절한 논술을 늘어놨다.

검블은 말한다. "예수님이 가시는 어디에서든 악을 제거하셨다(악령 축출을 의미). 악이 발견되는 곳에서마다 악을 멸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부름받아 할 일이다. 신나는 일이다(토크11)". 과연 그런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악을 제거하셨는가? 악을 발견할 때마다 제거하셨는가? 물론 하실 순 있지만..예수님이 헤롣의 여우 같은 간사성을 지적하셨지 그것을 "없애셨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만약 그러셨다면 헤롣도 구원받을 수 있었지 않겠는가?

'슬픔의 사람'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거부 당하신 슬픔의 사람이셨고 비통에 익숙해 있고..멸시를 당했다(이사야 53:3). 실제로 주님은 사역기간 내내 조롱과 비난, 저주와 거부를 당하셨다. 타당한 까닭도 없이 그러셨다. 제자들 대다수가 그분을 떠났다(요복6:66). 겥세마네 동산에서도 배신을 당하셨다. 아무 정당한 이유 없이 고문을 받으시고 처형됐다. 그런데 알파가 그리는 주님의 모습도 그런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상상해 봐요. 얼마나 재미있을까!"라고 검블은 말한다(토크2). 그는 알파를 실시하는 교회들이 되도록 코스 내내 재미와 릴랙스를 유지하도록 권유한다. 그는 또 늘 비공식 스타일로 말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주님의 일생은 희생과 곤고의 연속이었다. 만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재미'만 있진 않다. 아니, 복음서를 보면 인간적 재미라곤 별로 없다. 안 그렇다면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곁을 떠났겠는가? 성령강림절 전엔 왜 기껏 '다락방'의 120성도만 남았겠는가?

검블은 '삶에 대한 물음들'(2001년) 34쪽에서 예수님을 '웃음의 주님'이라고 부른다. 검블은 예수님이 웃으셨음을 강조하지만, 사실 주님은 웃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뤀6:25), 우는 자들에게 복있을진저(마5:4)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의로우심, 거룩하심

주님은 의로우시다(요서A 2:1). 알파 프로그램은 '의로움'이란 말을 몇 군데 사용했지만 주님 예수님께는 도무지 적용하지 않는다. 알파에서는 의로움을 단지 '옳은 관계'라고만 정의한다. 주님 자신이 의롭지 않고 단지 옳은 관계에 있는 존재시란 말인가?

'거룩'이란 낱말은 단지 의로울 뿐 아니라 '구별됨'이란 뜻을 포함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으로 30회 이상 기록됐다(예: 이사야 43:14,15, 47:4). '거룩'이란 낱말은 성경에 총586회나 나타난다. 따라서 거룩은 주님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일차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알파 토크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룩하다는 말은 100여회이고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도 잦은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크리스토가 거룩하다는 표현은 전체 비디오 세트 중 단 2번 밖에 안 나타난다. 그나마도 성구를 인용했을 뿐. 더구나 예수님에 관한 2개의 알파토크에서 '거룩'이라는 말이 안 나타난다. 더 나아가 알파는 거룩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네 교회이름 '홀리(Holy) 트리니티 브롬튼'엔 '거룩'이란 말이 들어있으니 이 어찌 아이러니가 아닐손가.

완전성

검블은 예수님 자신이 '한(a) 탁월한 모본(example)'이었다고 썼다. 그런데 과연 완전한 모본을 보이셨는가? 검블은 수시로 예수님이 "지고의(supreme) 모본"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지고'라고 해서 완전하다거나 완전순결하다는 뜻은 여전히 못된다. 그냥 '최고'라는 뜻일 뿐이다. 검블이 '완전한'의 뜻을 모를 정도의 정신박약자는 물론 아닐 터. 그는 다른 대상에게 실제로 '완전하다'는 형용사를 쓸 줄도 안다(토크5 참조). 또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다"는 표현도 한다(토크4). 그러나 예수님이 완전하셨다는 말은 아끼다 못해 쓰질 않는다.

검블은 "나는 예수님보다 더 완벽한..사람은 없다고 믿는다"('왜 예수님?' 7쪽)는 남의 말을 인용했지만 이 말도 그분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는 비교급일 뿐, 예수님이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샌디 밀러는 알파코스를 "더할나위 없을만큼 거의 '완전한' 프로그램"으로 3년여 자찬했다.    

아버지께 경외

주님의 모든 기도에서 느끼듯 그분은 아버지를 경외하셨다. 아버지께 관하여 말씀하실 때마다 깊은 존경을 표현했다. 실은, 그분의 기도가 상달된 까닭도 바로 아버지를 경외하셨기 때문이었다(히 5:7). 하나님은 우리가 크게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시89:7).

그러나 알파는 이 점에 관해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는다. 다만 "아빠(아람어로 한국어의 아빠, 영어의 daddy/papa와 대동소이함)는..예수님의 독특한 부분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이런 친밀성(intimacy)을 지니셨다..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게 하셨다. 찰스 왕세자는 명백한 왕좌 계승자다. 그러나 윌리엄과 해리에겐 아빠다."

심지어 검블은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사탄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담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죠. 그것이 마귀의 목표입니다..본래..그래선 안됐죠"(토크11). 그러나 성경은 검블과는 반대의 말을 한다(시111:10, 147:11, 뤀12:5, 이 8:13, 행 9;31).  

예수님의 아버지께 대한 태도가 이것뿐이라면 뭔가 잘못돼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됐지만, 거룩하신 그분을 여전히 경외로써 대해야 한다(뤀12:4~5 참조). 주님은 아버지를 경외(두렵게 섬김)하심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아버지를 두렵게 섬겨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검블은 이 점에서 크게 실패했다.

선재성

성경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한다(미5:2). 주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신다(요8:58). 그러므로 주님의 존재는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러나 뉴에이지는 메시아가 피조물의 하나라고 태연하게 주장한다. 바꿔말하면 피조물도 인류의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알파와 뉴에이지에 관해선 시리즈 다음 회에 간추리련다.]

니키 검블은 실제로 예수님을 선재하신 분, 영원하신 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에 관해 논할 때, 과거의 사랑보다는 지금과 미래로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주님은 세계의 기초가 있기 전부터 자신을 희생하셨다(티모티B 1:8~10, 계 13:8). 구약은 적어도 주님의 선재성에 관하여 성자출현 사건의 가능성을 비치지만(다3:25, 예슈아 5:13~15) 니키는 언급하지 않는다.

본 이슈에 관한 검블의 최선의 말은 "아들 하나님은 맨 처음에(at) 계셨다"는 것. 그러나 검블은 성자 하나님이 태초 이전에(before) 계셨다고 결코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말은 뉴에이저도 기꺼이 찬동할 수 있는 말이다. 첫 피조물이라면 왜 맨처음에(at) 없었겠는가? 검블은 예수 크리스토가 전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게 그렇게 번거로운 작업인가?

주님의 선재에 관한 검블의 또다른 최선의 말: "성삼위의 세 위(Persons)는 우주 창조 이전에 존재했다..성삼위의 세 위는 서로 사랑했습니다..우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주창조 이전에 성자가 '창조'됐을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하지 않은 말이다.

검블은 그의 책 '30일'(9쪽)에서 말한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로 (스스로) 선택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선재성을 꼭 말한다고 할 수 없는 진술이다. 불행히도 알파 교재는 점차적으로 이 문제에 문제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알파코스 참석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성경적 진리에 점점 '무지'해져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삶에 관한 물음들'(213쪽)의 한 문장은 "(예수님 이전의) 옛 언약 아래서는.." 하고 시작된다. 주님이 늘 존재하시는데 '예수님 이전'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 대신 '예수님의 성육신 이전'이든지 적절한 다른 어구를 썼어야 했다. 그러니까 검블에 따른다면, 주님은 마리아에게서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전엔 제대로 존재하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돼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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