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PPT Worship ::악보PPT 자막 쉽게 만들기::

기독교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본문

예배 자료실/설 교

기독교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나중된자 2008. 4. 25. 00:10

기독교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 여자 성도가 불치의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고침을 받기 위해 기도원에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치유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이었다.

마침 어느 날 저녁시간에 목사님 한분이 인도하는 신유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여자성도는 낫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간절하여 맨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님의 선포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중에 그 목사님이 어떤 일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불치의 암이 발병되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바라고 참석했노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들은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십일조 생활은 잘했습니까? 성수주일 잘 했습니까?

봉사와 전도는 열심히 했습니까? 주의 종을 잘 섬겼습니까?”

이 질문들을 받은 그 여자성도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니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어서 다 잘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그녀가 당하는 불치의 질병으로 인한 지금의 고통과 괴로움이 그런 신앙적 행위들을 잘 하지 못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목사님의 논리는 그 여자 성도의 문제가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잘 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질고들이 신앙생활의 문제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이 지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좋은 보답을 받게 된다는 인과응보설을 믿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결과를 낳게 하는 명백한 원인이 있다.

세상의 되어지는 일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는 쉽게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그 열심히 한 대가가 성적으로 나타나고 사업을 성실하게 잘

경영한 사람은 돈을 잘 버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이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어떤 때는 공부를 열심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저조하고 사업을 성실하게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상심할 때도 있다.

문제와 실패 그리고 사고와 질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원인은 분명히 있다.

자세하게 살피고 심사숙고하면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아무리 애를 써서 찾으려고 해도 신비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일 다반사다.

안 좋은 결과의 원인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면서까지 좋지 않은 현실의 원인을 억지로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과응보가 아니다.

잘했다고 칭찬하고 잘못했다고 처벌하는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치졸한 분이 아니시다.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의 흠 있는 것을 감싸 안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이다.

위에서 소개한 불치의 병을 얻은 여자 성도를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그 성도의 부족한 신앙생활을 탓하지 않으시고 그 여자 성도의 못 고칠 고통의 질병 가운데서 함께 아픔과 괴로움을 나누시고 계신 것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세상의 일이 잘되고 못되고를 신앙심의 좋고 나쁨을 근거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실의 삶이 전혀 암담하고 안 풀려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되새기면서 변함없고 굳건한 좋은 신앙을 갖은 성도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임상필 목사


------------

목사님의 말씀처럼 기독교는 인과응보의 내용을 초월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인과응보는 기독교의 흐르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적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물런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성적이 안 오를 수 있죠. 하지만 이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질병의 경우도 그 원인이 보통 과음/흡연/비정상적인 식습관/과로 등으로 그 원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인과응보적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겁니다. 정말로 인간이 알 수 없는 원인으로서 생기는 병도 있지만, 그것이야 말로 다반사가 아닌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 성적이 잘 안나온 사실에 대해서 단지 그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라는 것 말고, 그가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시험범위를 제대로 공부했는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었던 학생인지, 실제로 이 학생에게 학습능력은 얼마 되는지 등의 원인을 분석하다 보면, 그가 어떤 원인으로서 결과가 그렇게 나왔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질병도 병원에서 의사들이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 질병이겠지만, 30~40년은 오랜 잘못된 식습관이 그들 그렇게 만들었거나, 오래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발병되었음을 알아낼 수 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라는 생각보다는..
인생자체가 인과응보로서 흘러간다. 다만 해석되어지지 않는 부분은 우리가 신(기독교)의 영역에서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정도로 얘기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기독교의 구속의 진리는 인과응보를 초월하는데,
죄를 지은 인생은 지옥에 가는 게 마땅하지만, 기독교에서는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만 있으면, 그의 죄가 하늘에 닿았다 할지라도 천국에 가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는데,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가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은혜'의 차원이다.

누군가는 이 기독교의 진리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영화 밀양의 내용처럼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스스로 자신은 신이 용서했다고 말해 온다면, 누구도 하나님처럼 그를 형제로 받아드릴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날 우리가 신과 같은 은혜를 베풀 수 있다면, 그순간이 바로 우리가 신이 되어버린 순간일 것이다.

인간의 본능아래 복수의 본능이 있는 것같다. 복수의 본능은 자신의 목숨도 포기하도록 하는 큰 힘인데, 전쟁터에서 전우가 적군의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더 이상 호에 숨지 않고, 적진을 향해 뛰어가는 힘의 근원은 복수가 아닐까 싶다. 복수는 '지독한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데, 가장 잔인한 복수의 감정은 사랑했던 연인이나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복수의 마음은 인과응보라는 인간사의 보편진리에 따라 생기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부정을 저지르고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에게 부정을 저저르고 저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부정으로 인해서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면, 복수의 감정은 점점 우리를 가만히 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를 심판하지 않으면, 내가 심판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온 이 상태가 인과응보로 인해 공식처럼 '죄'가 '심판'받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그 사람의 복수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마 그의 아들이 복수의 칼날을 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아쉽게도 드라마의 스토리를 많이 인용하는 것이다.) 복수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감정을 자신이 검사가 되든지 형사가 되어서 복수를 하는 모습도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만약 그 사람이 복수 하지 못하고, 그냥 살았다면, 또 다른 사람이 어디선가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겠지만, 인과응보의 보편진리상, 누군가는 복수의 감정을 가지고 칼날을 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치인 것이다.
 
누구도 부정을 저지른 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어떤 철학자도 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어느 종교도 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기독교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마디로
모든 부정과 죄를 용납해 주는 면죄부가 아니다.

기독교는 존재자체의 회개와 존재중심에서의 고백을 요구한다.
이미 의인은 없다고 포기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속에서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죄를 뉘우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밀양의 유아 살인범은 그가 진실한 회개를 했다면, 그의 죽음 뒤에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그를 죽이고자 했던 그 마음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회개가 하나님께 천국을 약속 받지만,
기독교인의 회개가 인간들에게 모든 용서를 받는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세계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거대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받는다.
내가 오늘 죄를 지었다면 그 죄의 대한 댓가는 죄에 점점 중독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응보를 받게 된것이다.
내가 오늘 말씀을 펴보고 나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지나갔다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 아니라, (물런 안 그럴수 도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응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