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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자료실/신 학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중된자 2008. 3. 12. 19:29

목회현장에서 다시 쓰는 조직신학 8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김용복/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 교수


http://cafe.naver.com/cacadem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23



Ⅰ. 문제제기

 침례교 목회자 가운데 사도신경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침례교의 이상과 전통을 받아들여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을 반대해왔던 목회자들은 이 문제가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있다. 문제는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별 관심이 없거나, 목회 현실상 불가피하다고 판단해서, 아니면 사도신경이 성도들의 신앙교육상 유익하다고 믿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공적 예배에서 암송하는 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데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2000년 12월-2001년 2월) 한국 침례교의 담임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설문내용 가운데 사도신경에 관한 대목을 보면, 공적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고 답한 목회자는 전체 응답자(277명) 가운데 88명(31.8%), 암송하지 않는다는 목회자는 189명(68.2%)이었다. 이 수치는 현재 한국 침례교회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반영한다고 판단된다.

 이 글의 목적은 오늘날 모든 한국 침례교회들이 반드시 사도신경을 암송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도신경 암송금지라는 강제적 법을 만든다면, 그것 자체가 침례교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성도들과 목회자의 판단에 따라 사도신경을 받아들이고 암송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침례교회 안에는 그런 것을 규제할 강제적 기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 동안 침례교회의 선배들이 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한번쯤 분명하게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글은 침례교의 정신과 관련해서 사도신경의 문제를 몇 가지 각도에서 점검해보고자 한다.




II. 신앙고백과 신조의 차이점

 "신앙고백(Confession)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조(Creed)는 반대한다." 이것이 바로 침례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침례교회는 수많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지만, 신조는 거부해왔던 역사적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살펴보고, 신앙고백과 신조(사도신경)의 차이를 구분해볼 필요가 있다.


1. 신앙고백의 필요성

 침례교회가 신앙고백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앙고백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4:15)



 신앙고백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신앙의 주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함이다. 주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내가 덤으로 안고 들어가는 것이 신앙일 수 없다. 나는 나의 신앙의 주체가 된다. 그것이 비록 개별적인 신앙고백이든,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신앙고백이든, 그 신앙고백을 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신앙고백의 세 번째 필요성은 이단사상을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는 데 있다. 내가 믿고 있는 대상이 누구이며 어떤 내용을 복음으로 믿고 있는지 검증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신앙고백은 공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라고 하셨다.



 2. 신앙고백과 신조의 차이

 세상에는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는 법이다. 신앙고백의 유용성 못지 않게 그것이 안고 있는 문제점도 만만한 것이 아니다. 네 가지 차원에서 신앙고백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⑴ 형식성, ⑵ 강제성, ⑶ 획일성, ⑷ 우위성. 이 네 가지 특징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것을 신조라고 한다.

 침례교 목회자 허셀 홉스(Herschel Hobbs)는 신앙고백과 신조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앙고백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을 진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신조는 당신이 우리의 교회에 일부가 되려면 이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 .  남침례교는 결코 신조를 가지지 않는다. . . .  그들이 '만일 이것을 믿지 않으면 나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고백이 아니라 신조다."

 신앙고백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루어질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형식화되면 참 신앙은 살아남을 수 없다. 신앙고백이 강제성을 띠게 된다면, 그것은 자발적인 신앙을 보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신앙체험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동일한 형태로 신앙고백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획일화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신앙고백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나치게 중요시되고 강조되면 그것은 성경보다 높은 실제적인 권위를 차지하게 된다. 신앙고백이 신조로 변하면, 그때부터 그 신조는 나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과 과제는 자발적이고 다양성이 용인되는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그것이 획일화되고 강제성을 띠는 신조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1963년 미국 남침례교의 신앙고백(Baptist Faith and Message)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신앙고백의 원리를 참고하면 전체적인 윤곽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⑴ 신앙고백은 침례교회들의 일치된 견해로 이루어진다. ⑵ 신앙고백은 결코 완전한 진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유롭게 개정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⑶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침례교의 어떤 단체라도 그들의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출판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한이 있다. ⑷ 침례교 가운데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는 신구약성경이다. 신앙고백은 해석에 있어서 안내의 역할을 할 뿐, 양심을 지배하는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⑸ 신앙고백은 성서로부터 나온 종교적 확신에 대한 진술이다.  다른 삶의 영역에서의 탐구나 사상의 자유를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3. 사도신경이 나온 배경과 문제점

  1) 배경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이 신조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한국 교계에서는 사도신경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간주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실제로 사도신경을 예배 때 암송한다고 응답한 침례교 목회자들 가운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마지못해 암송한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과연 그런 것인가?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으면 이단인가?
사도신경은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일까? 본래 신앙고백이나 신조의 태동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 법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단순한 신앙고백들은 제2세기 교회에 전달되면서 여러 가지 다른 항목들이 추가되고 해석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형태의 신조가 생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적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이 서로 혼합되고 상호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니케아신조"를 필두로 여러 신조들이 형성되어 나갔고, 반면에 서방교회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비교적 통일성을 이루었다. 사도신경의 초기 형태는 이른바 "로마신조"라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거룩한 교회, 육체의 부활 등에 대해 대체로 단순한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 많이 첨가되었으며, 오늘날 형태로 완성된 것은 8세기 경이었다.



   2)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일반적인 이유


 침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신경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사실 그 내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용상으로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침례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다양성을 훼손하고 획일성을 조장하는 "신조"로서의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것이다. 침례교회는 역사적인 뿌리나 전통이 타교단과는 다른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는 교단이다. 국가교회(state church)를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거부하면서, 자유교회(free church)와 신자의 침례를 강조했던 침례교회가 형식화된 예배의식에서 사도신경을 의무적으로 암송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곱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침례교회가 성경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도들의 직접적인 신앙고백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사도신경을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사도신경 내용 가운데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목은 대개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던 8세기경에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을 일부 생략하거나 재해석하면서 굳이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3) 사도신경의 신학적 문제점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지옥으로 내려가셨다"(descended into hell)는 표현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에는 이 표현이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뒤에 실린 영어문장을 보면 그대로 남아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본래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은 구약적 의미에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방식이라는 해석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보편성을 확대시킨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 표현이 성경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5세기초의 아킬레이아 신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만일 한국 교회가 해석의 어려움 때문에 이 구절을 생략한 채 사도신경을 번역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가 이미 사도신경의 문자적 권위를 훼손한 일이 될 것인데, 이런 불완전한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는 "거룩한 공교회"(holy catholic church)를 믿는다는 표현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를 일반적인 의미로 "보편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로 재해석하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개신교회는 어떤 점에서 이런 보편적 교회관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개신교회는 너무 사분오열 갈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역사적으로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로마 가톨릭의 독선적 교회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이들이 말하는 교회관은 자신들의 교회가 베푸는 성사(聖事)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죄의 효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구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것이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세 번째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의 문제다. 이 표현은 지금도 천주교회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통공(通功)으로 해석한다. 참고로 한국천주교회 200년 기념책자, [이 땅에 빛을]에서 인용한 사도신경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로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성인의 통공"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는 같은 책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에 대한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금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인용하기로 하겠다: "완전무결한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이 완성되기까지, 희망을 가지고,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에 도달합니다....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기도는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연옥 영혼들과의 사랑의 나눔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교회용어로는 '성인들의 통공'이라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왜 그토록 죽은 사람들을 위한 미사와 기도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현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도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성도의 교제'라는 어법의 근원적 의미는 ... 신자들이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모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현재 신적인 구원이 완성된 하늘에 참여해 있는 거룩한 순교자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모였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어떤 면에서 신앙고백의 한 모델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위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개신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4. 한국 침례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문제


 그동안 한국 침례교회는 전통적으로 신앙고백을 사용하지 않았던 세계 침례교회의 관례를 따라왔다. 그러나 점차 사도신경을 공적 예배에 받아들이는 목회자들이 많아지고 있음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른 개신교회들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 사도신경을 굳이 사용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자유교회 전통 속에서 신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려고 노력했던 침례교회로서, 획일성과 강제성을 띨 가능성이 많은


 사도신경을 암송해야 할 이유를 무엇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설문조사를 통해 목회자들이 사도신경 암송을 공적 예배에 도입한 이유와 반대하는 이유를 직접 기록하도록 했다. 아래의 표는 그 이유를 많이 응답한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표) 사도신경을 암송하거나 반대하는 이유


III. 결론

 "한국 기독교의 풍토이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고 싶지 않아서," "타교단에서 전입한 교인들을 위해서" 등등. 목회 현실적으로 볼 때, 이런 실용적인 차원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문제는 현실상황이 진리와 상반될 수도 있고, 실용성이 항상 정당한 명분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침례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전통을 고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전통 가운데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필자는 역사적인 영국?미국 침례교회들도 스스로 외쳤던 "침례교의 이상과 정신"을 철저하게 구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침례교의 이상과 정신은 다른 말로 말해서 "순수한 초대교회의 이상과 정신"과 통하는 말이다. 침례교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교단보다 그나마 그 정신과 원리가 순수한 초대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근접해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공적 예배에서 암송하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로 삼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내용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신앙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침례교의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공적 암송을 거부한다는 일부 목회자들의 의견에서 잘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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