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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들 ‘단일신론과 양태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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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들 ‘단일신론과 양태론’

나중된자 2008. 3. 12. 19:56

출처 : http://eunra.com/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들 ‘단일신론과 양태론’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31 [2006-07-21 07:56]

1.1. 삼위일체론

1.1.1. 단일신론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분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터툴리안’이라는 교부, 즉 변증가입니다. 터툴리안만이 아니라 이레니우스라는 교부들은 한결같이 ‘영지주의’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물론 이레니우스가 터툴리안보다 훨씬 더 ‘영지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두 분은 이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에 관해 강조했습니다.”

“더욱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분에 관해 당시 사람들은 혼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생하시는 아들이라고 했으니 또는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으셨다고 하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종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종속하는 것을 보니 아들은 아버지보다 열등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성령 하나님은 보내심을 받는 분이시기 때문에 더욱 열등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지도자들, 즉 교부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이심을 강조하는 데 힘을 모았습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이 서로 동일하심을 강조하는 데 노력했던 인물을 오리겐이었습니다. 오리겐에 의하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모두 위격, 즉 신의 내적인 관계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구별을 나타낼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삼위일체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한 가지는 ‘위격’의 의미입니다. ‘일체’라는 것은 신ㆍ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한 분이시라는 것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삼위일체에서 ‘삼위’의 ‘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늘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이에 대한 어려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양태론’(modelism)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론’(adaptionism)입니다. 양태론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교수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단일신론’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초대교회사에 관한 책자를 읽을 때에 늘 삼위일체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용어인데요.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어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단일신론’(monarchianism)이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만을 강조하는 사상이지요. 문자적으로 설명하면, ‘monarch’라는 말이 군주라는 뜻을 갖고 있죠? 그럼 하나님께서 군주처럼 그리스도와 성령을 지배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군주체제식의 신관이라 여기는 것이 좋죠. 성부 하나님이 가장 우두머리라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단일신론이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양자론적 단일신론’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저는 여기에서 그냥 양태론과 양자론이라 부르는 것이죠. 전자를 가리켜 그냥 ‘사벨리안주의’라고도 부르고, 후자를 가리켜 그냥 ‘아리안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교수님, 왜 양자론을 오리겐주의와 루키안으로 나누는 것입니까?” “예~ 제가 계속해서 설명하겠지만 질문하셨으니까 간략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양자론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단순히 하나님이 부여하신 어떤 능력으로 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1에 나오는 ‘로고스’라고 보는 것이죠. 그 이론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났지만 세례를 받기 전까지는 로고스로 힘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죠. 이런 사상을 처음으로 암시하고 제공했던 자가 바로 오리겐입니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한다고 주장했던 자입니다. 이러한 종속설이 바로 아리안들에 의해 채택된 것이죠.

1.1.1.1. 양태론

“양태론은 삼위일체의 일체를 고수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한 분 계시는데 창조 때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구원을 이루실 때는 성자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고, 그리고 구원 사역을 성취해 가실 때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양태, 즉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세 분 하나님이 아니라 세 모습으로 나타난 한 분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어떤 때는 아버지로, 다른 때는 회사원으로,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아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사람이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것이죠. 한 분 하나님을 유지했지만 그 하나님의 삼위의 구별을 짓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히폴리투스의 모습
“이런 양태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자는 프락세아스(Praxe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락세아스라는 사람은 로마시에 나타나 당시에 유행하던 양자론에 반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정통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동시에 ‘영지주의’에 관해 어느 정도의 답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태론을 선호했습니다. 그를 이어서 ‘노에투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 라는 사람들이 그의 양태론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락세아스처럼 이런 사람들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고통은 곧 성부 하나님의 고통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부 고난설’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성자 하나님이 죽으신 것은 곧 성부 하나님이 죽으신 것으로 여겼죠.”

“양태론이 더욱 발전하게 된 것은 로마감독 제피리누스와 칼리스투스 때에 활약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에 의해서입니다.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강조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은 세 이름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다른 이름을 가진 것에 불과하고 다른 사역의 형태를 나타낼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설명으로 인해 방금 말한 두 명의 로마 감독들도 그의 견해를 추종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혜성처럼 나타났던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양태론을 추종하고 교회 재산을 횡령하는 두 명의 감독들을 비난했습니다. 로마에서 다른 교회를 세워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황제에 의해 ‘적대교황’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쓴 『모든 이단들에 대한 논박』(Philosophoumena)은 이때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대체적으로 양태론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겨지네요.” “방금 설명을 통해 그렇게 만일 느꼈다면 제가 설명을 잘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가운데 정통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태양, 빛, 그리고 열로 설명했다면 죄송하지만 양태론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했다는 것이죠. 물론 잘못된 설명입니다. 비록 한 분 하나님이심을 설명할 수 있지만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단성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다른 설명, 즉 양자론에 관해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양태론이 정통적 삼위일체 설명으로 오해될 수 있다면 양자론적 설명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따르는 형태이기도 합니다. 양자론은 약 190년에 로마에서 그 자취를 드러냈습니다. 양태론이나 양자론 모두 로마에서 그 사상의 시작점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흥미있는 일입니다. 데오도투스라는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로마감독 빅토르(189~198)는 데오도투스를 출교시켰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데오도투스라는 사람이 로마감독 제피리누스(198~217) 시기에 위와 같은 양자론을 억지 주장했습니다. 그런 후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 200~275)은 완전하게 도덕적으로 생활한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또 지속적인 이적들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268년 안디옥의 지역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제 양자론적 설명은 사모사타의 바울 다음으로 안디옥의 루키안과 그의 제자 아리우스에게로 연결됩니다. 이 중에서 아리우스가 양자론을 가장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이단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켜 ‘아리안’(Arian)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사상을 가리켜서 ‘아리안주의’(Arianism)라고 합니다.”

1.1.1.1.1. 루키안

“아리우스의 스승 루키안은 사모사타 출신으로 안디옥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약 312년 순교한 자이기도 했습니다. 루키안은 예수님의 인간 의지와 인성을 강조했던 사모사타의 바울을 추종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성령에 충만한 초자연적 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상태의 인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초자연적 인간으로 여기는 루키안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관해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보고 아리우스만 아니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라는 자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한 사람은 가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입니다. 이분은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최초로 쓰신 분이고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정치적 인물로서 니케아 범종교회의에서 아리안 편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인물입니다. 혼동되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눈치를 보니까 벌써 혼동하시는 분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네요. 하하하.”

1.1.1.1.2. 아리우스

“아리우스라는 사람에 관해서는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조직신학에서도 끊임없이 줄기차게 등장하는 이름이 될 것입니다. 그의 사상을 가리켜 ‘아리안주의’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학사상을 무리를 지어 분파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가장 이단적 영향을 많이 끼친 자입니다. 결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아리안주의를 받아들인 지역은 대체적으로 이슬람으로 인해 점령당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하박국 아닙니까? 악한 자가 흥왕할 때 하박국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때 그가 받은 답변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더 악한 자가 악한 자를 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죠.”

▲소크라테스가 쓴 『교회사』의 겉표지
“아리우스(약 256~336)의 개인적 기록을 우리는 접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311년 이후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장로 또는 사제로 사역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그는 이미 상당히 나이가 든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처럼 모범적 삶을 위해 금욕적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동시에 루키안의 다른 제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교회 역사가 가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와 친분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313년부터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있던 알렉산더는 이에 대하여 성자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동일하신 분임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해 교회 역사가인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철학자 소크레테스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하하하.

아리우스는 합당한 논리적 사고를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고 하면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시작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자가 없었던 때가 있다는 의미죠.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이 사태를 신속히 마무리하기 위해 320년에 이집트 감독들 약 1백여명이 모인 종교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토록 하고 출교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직분도 파직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감독 알렉산더에게 서신을 썼습니다. 그 서신 안에서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확연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서신의 일부를 방금 읽으신 강경희 씨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하나님은[성자는] 항상 성부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성부가 아니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십니다. 무에서 창조된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영원하신 분)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분을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자는 피조물이며 사역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본질에 있어 성부와는 다를 뿐만 아니라 본성상 성부의 참된 말씀이거나 참된 지혜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했을 뿐입니다.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처럼 변덕스러운 성품을 지녔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부는 성자에 의해 설명하기 어려우신 분입니다. 그에게 보이지도 않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성부를 완전하게 또 정확하게 알지도 못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구별도 할 수 없는 자일뿐입니다. 성자는 자신의 본질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되었던 것이고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http://www.cyworld.com/amos2008/112917 스크렙

1.1.1. 니케아 범종교회의

“범종교회의와 교리논쟁을 연관짓는 것이 1차 범종교회의를 배우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2차 범종교회의는 삼위일체론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고, 3~4차 범종교회의는 기독론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종교회의’라는 용어와 ‘범종교회의’라는 용어에 무슨 차이점이 있는가요?” 민상석씨가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325년 이전 범종교회의가 있기 전까지 지역 감독들의 모임, 즉 종교회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synod가 있었는데 감독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거나 교회적 문제가 일어났을 때 해결하기 위해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약 190년 부활절 일자를 정하는 일에 있어 종교회의가 있었고, 약 250년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은 정기적으로 감독들의 종교회의를 가졌습니다. 갖가지 종교회의를 통해 정통 신앙들을 점검하게 되었죠. 그런데 ‘범종교회의’는 범지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황제가 소집했습니다. 수적으로도 가히 지역종교회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습니다.”

“그럼 교수님, 지금까지 몇 차례의 ‘범종교회의’가 있었는지요?” 민상석씨가 계속하여 질문했다.

“민상석씨!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펴보게 될 1~4차 범종교회의들, 즉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그리고 칼케돈 회의들까지를 프로테스탄트들은 범종교회의로 인정합니다. 1~7차 범종교회의를 동방정교회에서는 인정하는 것에 반해 로마 가톨릭은 1~21차 범종교회의를 억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님! 왜 그렇게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지요?”

“예~, 민선생님이 쉴 틈을 주지 않는군요? 4차 범종교회의가 451년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로마 가톨릭주의가 일어나면서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주의’가 일어났다는 말이죠. 그리고 동방정교회의에서는 5~7차를 덧붙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인 장소가 대체적으로 동방지역이기 때문입니다. 8차부터 지역은 서방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죠. 여기에다가 자신들이 7차까지 만을 범종교회의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Orthodoxy’(정교회)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8차부터는 서방교회에서만 범종교회의를 인정하고 있죠.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궁금증이 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그럼 니케아 범종교회의에 관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니케아 회의에서의 공식적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318명 정도의 감독들이 동방교회를 어지럽혔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집했던 것입니다. 225명은 동방교회에서, 4명은 서방교회에서, 그리고 그 외에는 소속이 불명확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연히 1차적 문제는 아리안주의였고, 2차적 문제는 분파에 관한 현안이었습니다. 키프리안을 다루면서 등장했던 노바티안 분파자들과 도나투스파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올바른 교회임을 주장했던 것을 기억하시겠죠?”

“아리우스는 예수님이 순전한 피조물이었고, 무에서 창조되었고, 타락할 가능성을 언제든 지닌 사람이었고, 양자된 하나님의 아들이지 본성상으로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리고 이름으로만 하나님으로 불렸다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설교에서, 저서에서, 그리고 서신들을 통해 널리 알리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습니다. 아리우스 보다 앞서는 교부들의 가르침과 그의 주장과 비교해보면서 아리우스의 주장이 얼마나 그릇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삼위일체’(Trinity)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세례의 형태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으로서 자신의 제자들이 되려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신앙을 고백할 때 위의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셨습니다. 이러한 ‘성삼위일체’의 세 이름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 진리이며 중요한 진리였습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잘 나타나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Sumela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니케아 범종교회의 그림
“아리안주의가 있기 전에 기독교계에서 쓰인 2~3세기의 작품들을 보면, ‘성삼위일체’에 관한 가르침과 고백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과 비교해볼 때 아리안 가정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죠. 약 323년 아리안 위기가 일어났을 때 삼위일체론에 반대하여 아리안을 따르는 자들과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교회 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거의 5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사에서 최초로 정부, 즉 로마제국이 교회 문제, 즉 신앙 논쟁에 간섭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혁신자들의 편에 서서 전통적 진리를 변호하는 자들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범종교회의에 대한 불행한 사실은 그 범종교회의에 대한 자세한 회의록을 우리가 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식은 대체적으로 당파적인 저자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당시 종교회의에는 두 명의 저자가 참석하였는데 회의를 소집한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찬미자이고 이단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인 가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회의록이 쓰였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기 범종교회의의 기록들은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그릇된 견해를 아리우스는 서신들을 써서 유포하며 추종자들을 모았다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든 인물들 중 루키안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로마제국이 ‘4두 정치’아래 있을 때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루키니우스의 배우자며 콘스탄틴 대제의 누이였던 황후 콘스탄티아, 콘스탄틴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매우 가까운 친분을 가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d. 342)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매우 정치적이죠. 아리우스는 정말 정치적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인물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입니다. 무슨 혜택이라도 볼까 해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직설적인지는 몰라도 실제 그렇습니다. 여기의 유세비우스는 후에 339~342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 됩니다.”

“점점 교회적 문제가 의견 불일치로 치닫는 것을 간파한 콘스탄틴 대제는 호시우스를 급파하여 사건 진상을 파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호시우스는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시리아 등지에서 모인 56명의 감독들의 견해를 듣게 되었는데 모인 감독들은 만장일치로 아리안 견해를 정죄하고 출교를 명했습니다. 이제 325년 봄이 되었습니다. 지역 종교회의를 개최해서 교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콘스탄틴 대제는 5월 20일 니케아에 있는 황제의 여름 궁정에서 범종교회의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318명의 감독들이 로마제국 여기저기에서 참여했습니다.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감독들로서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소아시아, 페르시아, 다뉴브강과 에게해 지역, 그리고 그리스에서도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아프리카, 스페인, 고올, 그리고 이태리에서 각각 한 명의 감독이 참여했습니다.”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신학논쟁 ‘니케아 범종교회의’(2)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34 [2006-08-15 05:01]

1.1. 삼위일체론
1.1.1. 니케아 범종교회의

“종교회의 기록을 남기고 있는 가이사리아의 유세비우스는 참여했던 감독들 가운데는 핍박 시절에 불구가 된 몸을 가지고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한 콘스탄틴 대제는 참여한 감독들에게 간단한 환영 연설을 하고 격려했습니다. 교회의 모반은 자신에게 매우 불편한 사건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범종교회의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죠. 종교회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은 만장일치로 아리우스 신학이 정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참석한 감독들 318명 가운데 아리우스는 겨우 22명의 지지를 받았을 뿐입니다. 다음은 종교회의가 작성한 ‘니케아 신조’입니다. 채송화씨가 읽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전능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믿는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특이하게 나셨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본질(ousia)로부터 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시오,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셨지만 창조되신 분이 아니시며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시고 성육신하시고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었고,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또한 성령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그분이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거나, 그분이 나시기 전에 계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무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하거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다른 존재들이나 본질로부터 만들어졌거나 창조되었거나 변할 수 있다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사도적 교회는 정죄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 깊게 새겨야할 단어는 ‘동일본질’, 즉 호모우시우스라는 단어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동일하신 본질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적 단어가 아님에는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호시우스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단어를 사용하여 삼위일체를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 첨가했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감독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이 신조를 통과시켰고 콘스탄틴 대제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삼위일체를 다룬 후 감독들은 다른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분파자들에 관한 문제였죠. 분파자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보편교회의 가르침을 수용해야한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부활절 일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적 유월절에 부활절을 지킨 것처럼 로마인들도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집트 감독들은 이러한 결정을 자신의 교인들에게 통보했습니다.”

▲발표되는 니케아 신조
“끝으로, 감독들은 20가지 교회법(canons)을 선포했습니다. 5가지 교회법들은 최근 핍박 중에 신앙을 포기했던 자들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배교했던 자들은 12년의 참회를 행한 후 성찬식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참회가 완성되기 전에 죽게 되거나 몸이 아프게 되면 ‘노지성체’(路地: Holy Viaticum)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타락한 교리 입문자들은 3년간의 참회를 행해야만 하고 군대를 떠났다가 다시금 군입대를 해서 황제 리키니우스를 대패시킨 기독교인들은 13년 동안 참회를 행해야만 했습니다.”

“이단성을 가진 분파자들을 사면하는 내용도 두 가지 법령에 담겨 있었습니다. 75년 전에 있었던 ‘적대 교황’(antipope) 노바티안으로 시작된 분파자들은 참회하는 죄인들을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나 성의 없게 다루었다고 불평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바티안은 로마제국 황제 데시우스 핍박(250) 시기에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므로 은혜로부터 멀리 떠난 자들이 영원토록 교회로부터 추방당해야한다고 주장하여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교회가 핍박의 시기에 배교한 자들을 면제할 권한을 소유했음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은 스스로 ‘순결한 자들’(Pure)이라 칭하고 우상숭배, 성적 범죄, 그리고 살인죄를 멀리했습니다. 재혼을 성적 범죄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소아시아에 노바티안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범종교회의는 이러한 노바티안들을 용납하고 보편교회 성도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 분파자는 사모사타의 바울, 즉 안디옥의 악명 높은 감독이었습니다. 268년 감독들의 지역 종교회의에서는 그의 이단성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파울리니안들’(Paulinians)은 다시금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직자로 재개하려면 다시금 수임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음 10가지 교회법은 성직자 생활의 여러 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거세한 자들은 수임을 받을 수 없고, 최근에 믿음을 소유한 자도 수임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 교회법은 세 지역, 즉 대주교구, 즉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그리고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범종교회의는 고대 관습을, 즉 알렉산드리아 대감독에게 이집트, 리비야, 그리고 펜타폴리스 교구를 지배하도록 했습니다. 이들 중 예루살렘 대교구가 가장 높은 교구라고 밝혔습니다.”

“위와 같은 많은 일들을 다루었던 니케아 범종교회의는 325년 6월 19일에 열린 후 4주 동안 개최되었습니다. 이 해는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치정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자~ 기나 긴 아리안 논쟁이 삼위일체론을 해결한 것처럼 속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교수님의 의도에는 무엇인가 만족치 못하시는 것을 암시하는 듯 했다. 그래서 성민은 교수님께 질문하기로 했다. “교수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삼위일체 논쟁을 위해 종교회의가 개최되었고, 만장일치로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모여 아리안 사상을 정죄했고, 그리고 신조까지 만들었는데 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잘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성민씨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제가 2차 범종교회의가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잖습니까?” “그것은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 다른 문제들을 다뤘던 종교회의였다고 여겨지는데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차~4차 범종교회의도 모두 삼위일체 논쟁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교수님의 말씀대로 1차 범종교회의로 삼위일체론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 되잖아요. 허참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니케아 종교회의 결정에 아리우스가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적인 힘을 통해 자신의 억지 주장을 계속적으로 함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정치적 잔꾀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근본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매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콘스탄틴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헛된 욕망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높은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더욱이 그는 범종교회의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 시작부터 그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작성한 자신들의 문서를 제출했습니다. 승리할 자신을 갖고 있었기에 너무 서두른 것이죠. 이것이 결국 단점으로 드러나게 되었죠.”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감독들이 아리안 문서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힘껏 정통신앙을 고수하면서 변호했던 교부는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328년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감독직을 계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335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안들을 심하게 다뤘다는 혐의를 받고 감독직에서 면직을 당했습니다. 이일로 인해 황제 콘스탄틴에게 청원했지만 336년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